주석 2: 회유책의 효과

질문하기는 쉽다. 진짜 답을 찾기는 더 어렵다. 사람들은 답을 갈망하지만, 아직 인식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동행자 보고서의 메시지를 숙고할 때, 사람들은 큰 공동체에 대한 인식과 감수성을 기르기 시작해야 한다. 질문에 대한 답을 얻는 것만으로는 이러한 인식이나 감수성이 길러지지 않는다. 그리고 실제로, 당신에게 정답이 있더라도, 만약 그 답을 경험할 수도 없고, 알아볼 수도 없고, 어떻게 적용하는지 알 수도 없으면, 그 답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 답은 질문하는 사람에게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답은 항상 인식과 감수성을 기르고, 아는 능력을 기르는 것으로 되돌아온다. 사람들은 증거를 원하므로, 누구든 전문가라고 여겨지는 사람에게 가서, 그 전문가의 의견을 듣는다. 그리고 “아! 그 전문가가 그렇게 말했으니, 이것은 증거임이 틀림없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모두 견해이다.

앎이 없다면, 모든 것은 마음속 견해일 뿐이다. 그리고 이 견해는 사람들의 조건화와 태도, 기질에 의해 형성된다. 사람들은 어떤 것을 경험하고 결론을 내리고 평가를 할 수 있지만, 그들의 판단은 완전히 틀릴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상위 의식에 관해 이야기하지, 답을 얻는 것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 상위 의식이 없다면, 답은 충분하지 않을 것이고,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궁극적으로, 당신은 이 상위 의식을 얻어야 한다.

이 의식은 인간의 문화나 인간의 조건화, 심지어 당신의 생물학적 정체성도 초월한다. 이 의식은, 당신 주변에서 또 다른 모든 것을 통해서 움직이는 삶을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이다. 식물과 동물, 날씨, 세상의 움직임을 이해하려면, 당신에게 이 상위 의식이 필요하다. 정신 환경에 부정적인 힘이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하고, 당신을 돕기 위해 이곳에 있는 천사들의 현존을 이해하려면, 당신에게 이 의식이 필요하다.

그리고 세상에 있는 큰 공동체 세력을 알아차리고, 그들이 드러내는 모습이나 그들의 의도와 방법을 인지하려면, 당연히 당신에게 이 의식이 있어야 한다. 또 친구와 적을 구분하려면, 당신에게 이 상위 의식이 필요하다.

그래서 사람들이 많은 질문을 할 때, 진짜 대답은 상위 의식을 기르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당신은 신비로 들어가며, 이 신비는 당신이 가고 싶지 않은 곳일 수도 있지만, 이해하려면 가야 하는 곳이다.

이것이 바로 당신 삶의 신비이다. 즉, 당신이 아는 것에 대한 신비, 본연의 당신에 대한 신비, 당신이 왜 이곳에 왔는지에 대한 신비, 당신이 응답해야 하는 것에 대한 신비이다. 당신은 단순히 인식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더 많은 답으로 당신 마음을 가득 채우려고 여기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상위 의식을 기르는 것이 상황을 올바른 방향으로 움직이게 한다. 그러나 물론 신비를 견딜 수 없어서, 답이 있어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답이 자신의 물음을 해결해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동행자 보고서에 대해 알아보고 당신에게 질문할 사람들 대부분이 여기에 속할 것이다. 당신은 동행자에 대한 모든 질문, 즉 그들이 누구이고 어디에서 왔고 어떻게 여기에 왔고 어떤 추진 방식을 썼고 어디에 숨어 있고 어떻게 소통하는지, 개인적으로 답할 수 없다. 당신이 이 모든 질문에 과연 어떻게 답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당신은 동행자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그들이 전하는 메시지의 타당성을 알아차릴 수 있다. 당신은 동행자들이 지닌 관점과 강조하는 것, 또 왜 그 관점이 필요한지 이해할 만큼 삶과 자연에 대해 충분히 배웠다. 당신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상위 의식 때문이지, 당신에게 답이 있기 때문이 아니다.

인류의 동행자 보고서는 묻기를 권장한다. 그들이 모든 물음에 답하지 않는 까닭은 당신이 상위 의식을 길러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들이 자신들에 관해 독자들에게 모든 것을 말한다면, 사람들은 “흠, 나는 믿지 않아! 마샬이 모든 것을 꾸며내고 있다!”라고 말할 것이다. 상위 의식이 없다면, 사람들은 연결될 수 없다.

당신은 이미 개입자들이 만든 회유책의 효과를 확인할 수 있다. 자신의 성향이나 외부의 영향으로, 이미 회유책의 희생양이 된 사람이 많다.

여기서 사람들은 실제로 어떤 것도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믿게 된다. “나는 부정적이고 싶지 않으며, 개입에 마음을 열 것이다.” 누가 개입에 마음을 열라고 그들에게 말했는가?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나든 마음을 열 것이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마음을 열라고 누가 그들에게 말했는가? 사람들의 비평안이 파괴되고 있다. 그래서 어떤 일이 일어나면, 그들은 “글쎄, 나는 상황을 판단하고 싶지 않아.”라고 말한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 당신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따져 보아야 한다.

이 사람들은 자신이 비판적이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글쎄, 나는 정말 비판적이어서는 안 된다. 나는 부정적이고 싶지 않다.” 어떤 것이 정말 적절하지 않다고 말하고 공개적으로 밝히는 것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사람들은 그것조차 할 수 없다. 이 회유책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결정조차 내릴 수 없다. 그들은 어떤 것을 보고 “이것은 좋은 것이다.” 또는 “이것은 실제로 나에게 좋은 것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없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것을 환영하면서, 그것이 삶과 함께해야 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당신이 삶과 함께해야 하는 방식이 아니다. 모든 것을 기꺼이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당신이 모든 것을 받아들여 모든 것과 유대 관계를 맺고, 모든 것을 환영해야 한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당연히 그래서는 안 된다. 상위 의식이 있다고 해서 당신이 비판적 평가를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단순히 더 높은 전망점에서 사물을 본다는 뜻이다.

이것은 모든 것이 회색이 된다는 뜻이 아니라, 모든 것이 분명해진다는 뜻이다. 당신은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 무엇이 좋고 무엇이 좋지 않은지를 분명하게 안다. 만약 영적 공부를 통해 이것을 알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무능력하게 된다.

당신이 어떤 상황을 당신의 조건화나 믿음에 기반을 두고 판단하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궁극적으로는 당신 내면에 있는 영적 지성인 앎에 기반을 두고 상황을 판단해야 한다. 이 앎이 당신 분별력의 최종 결정권자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들은 첫 단계를 밟고 그것을 마지막 단계라고 생각한다. 첫 단계에서는 당신이 판단하지 않는다. 이것은 어떤 것을 바라보고 인지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뜻이다. 어떤 것을 즉시 판단하면 그리할 수 없다. 이것이 첫 단계이지만, 사람들은 마지막 단계라고 생각한다.

마지막 단계는 첫 단계와는 매우 다르다. 당신은 곧장 판단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신이 바라보는 것을 보고 알고 인지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분별력이다. 상황을 즉시 판단하면 분별할 수 없다. 그렇지만 이 분별을 하고 나면, 당신은 어떤 것이 좋은지 아닌지 분명히 보일 것이다.

그래서 당신은 개입이 인류에게 정말로 좋지 않다는 것을 인지할 수도 있다. 개입은 그 자체가 좋은 것이 아니다! 그런데 만약 당신이 “오, 나는 상황을 판단해서는 안 돼.”라고 말하면, 당신은 어떻게 알 것인가? 당신은 “글쎄, 아마 다른 수준에서는 개입이 좋을 수도 있지.”라고 생각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회유된 사람들은 “일어나는 모든 일이 우리에게 좋으므로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식으로 좋은지 볼 거야.”라고 말할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인간의 무지가 아니라, 회유책의 효과를 보여준다. 이 회유책이 사람들을 부추겨, 분별력 없이 자신도 모르게 어떤 것을 신뢰하게 한다.

당신은 이것을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 UFO 커뮤니티에서도 볼 수 있고, 영성 공동체에서도 볼 수 있다. 당신 주변 사람들에게도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동행자 보고서는 분별할 것을 주장하므로 파장을 일으킬 것이다. 그 보고서는 “개입은 당신에게 좋지 않다.”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이 “글쎄, 잘 모르겠다. 틀림없이 좋을 거야. 나쁠 수는 없을 거야.”라고 말한다. 그들은 혼란스러우며,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모른다. “글쎄, 나는 모르겠어. 정말이지 개입에 대해 어떤 결정도 내릴 수가 없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가? 당신에게 결정 장애라도 생겼는가? 만약 그렇다면, 누가 그렇게 만들었는가? 왜 어떤 사람들은 모든 것에 마음을 열어야 하고 모든 것을 수용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물론 그들은 판단하지 않고자 하지만, 그것은 단지 첫 단계일 뿐이다. 그들은 다음 단계를 밟지 않으며, 분별력도 발휘하지 않는다. 어떤 경우에는 분별력을 잃어버렸다.

이것은 중요한 문제이다. 이 회유책의 결과로, 사람들은 볼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다. 혼란스럽고 겁을 먹을지 모르지만, 기본적으로 그냥 따라갈 것이다. “글쎄, 나는 그냥 따라갈 거야. 내 삶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그냥 받아들일 거야.” 회유된 사람들은 저항할 수 없다. 그들은 맞서 싸우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므로 어떤 것에 맞서 싸울 수 없다. 그들은 모든 것을 포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생각이 어디서 왔는가?

아무 의심 없이 수용한다는 이런 개념은 오늘날 당신이 아는 많은 영적 가르침에 널리 퍼져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런 개념을 진심으로 받아들인다. 그들은 “글쎄, 이것이 더 높은 진실이야. 우리는 높은 진실을 따른다.”라고 생각한다. 이것을 회유책의 관점에 비추어 보면, 당신은 회유책이 실제로 얼마나 널리 퍼져 있는지 알기 시작할 것이다.

회유된 이들은 실제로 자신들의 모든 힘을 빼앗기고 있는데도 상위 의식을 얻고 있다고 믿게 될 것이다. 회유책은 인간의 심리와 성향에 대한 이해에 기반을 둔다. 여기서 사람들은 신에게 인정받으려면, 신이 그들에게 사용하라고 준 것을 기본적으로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하도록 조건화된다. “글쎄, 신에게 인정받으려면, 나는 유순하고 온화하고, 판단하지 않아야 하고, 모든 것을 포용해야 한다. 나는 모든 것에서 좋은 점을 찾겠다.”

이런 생각이 어디에서 왔는가? 그런 묵종은 순전히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인가? 단지 그 순간의 행복을 위해 사람들이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인가? 어떤 경우에는 이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인류가 사용한 회유책을 생각해 보라. 사람들은 어떻게 회유되는가? 사람들에게 듣고 싶은 것을 들려주며, 다른 것은 숙고할 필요가 없다고 말해준다. 결국 당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좋다면, 왜 어떤 것에 저항하는가? 그냥 모든 것을 수용하라! 이것이 바로 모든 곳에서 작용하는 회유책이다.

이 영향력은 당신 주변 어디에나 퍼져 있다. 사람들은 개입이 작용하는 곳에 몰려들어 그곳의 “에너지”가 매우 강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이곳은 정말 깨달음을 주는 장소야.”라고 말한다. 맙소사, 그들은 불 속으로 뛰어들며, 진심으로 자신을 내어준다. 그리고 이런 곳에 가서 에너지를 느끼고, “오, 여기는 정말 강력한 곳이야. 여기가 바로 그 깨달음이 일어나는 곳이다!”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더 오래 머물수록, 그들은 더 모르게 되고, 이전 삶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을 덜 하게 된다. 그들은 더욱더 무기력해지고 자신밖에 모르게 되며, 더욱더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이 단절로 인해 더 깊은 수준, 즉 당신 삶이 진보하지 않고, 당신이 가야 할 곳으로 가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수준에서 불안감이 생긴다. 그렇지만 이 사람들은 이 불편함이 그들에게 있는 두려움의 일부이거나, 자신에게서 근절하고 몰아내야 하는 심리의 일부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 삶이 빗나가고 있고, 자기 삶을 잃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바로 그 신호들을 무시하려고 열심히 노력할 것이다.

그들은 “모든 것은 사랑이다. 그냥 사랑하라. 오직 사랑만 있다.”라고 말할 것이다. 만약 그들이 자신이 말하는 것을 안다면, 실제로 그것은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사랑이 단순히 수동성, 행복, 묵종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회유책이 그들에게 그렇게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이제 그들은 회유책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알려주며 그들 자신이 회유자가 된다.

시간이 좀 지나면, 그들은 자신이 무엇을 아는지 모를 것이다. 실제로 어떤 일이 잘못되면, 그들은 불편함을 느끼겠지만, 그것은 단지 자신에게 있는 심리적 문제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그 문제를 간과하거나 치워 버리거나 묻으려고 할 것이다. 그러고 나서 개입자들이 그들에게 하라는 대로 할 것이다. 그들은 “오, 나는 메시지를 받았다. 나는 이것을 하러 가야 해. 나는 안내를 받고 있어. 이것이 나를 위한 내적 안내야.”라고 말할 것이다.

이것에서 사람들을 깨우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다. 먼저 당신 스스로 깨어나야 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무기력함과 행복 추구에 너무 몰두해서 거의 어찌 해볼 수 없는 지경에 있는 것 같다. 그들을 잘 구슬려 놓았고 매우 조건화해 놓아서, 그들을 깨우려면, 당신은 그들의 무릎에 폭탄을 떨어뜨려야 할 것이다!

당신은 많은 곳에 있는 영성 단체에서 이 회유책의 효과를 볼 수 있다. 물론 모든 사람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에게 묵종이 쉬운 길, 쉬운 방식, 진정한 행복에 이르는 길처럼 보인다. 어떤 것을 알기를 포기하고, 평가하기를 포기하고, 저항하기를 포기하면, 이제부터는 모든 것이 그저 행복이고, 앞으로는 아무 어려움이 없을 것으로 보인다.

개입자들이 이 착한 사람들을 단순히 무기력한 상태로 만들고 나면 이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고, 자신에게 전해지는 것은 무엇이든 받아들일 것이다. 이들이 자연스럽게 아는 능력은 이들의 의식에서 완전히 제거될 것이고, 그 능력은 이제 장애물이 될 것이다. 이들은 그 능력이 두려움이라고 생각할 것이고, 부정적이라고 생각할 것이며, 그 능력의 어떤 부분도 원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일이 지금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 우리는 극단적인 경우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이 극단적인 경우가 범위와 규모 면에서 커지고 있다. 더욱 많은 사람, 심지어 젊은 사람들까지 이런 상태에 그냥 빠져 있으며, 그중 일부는 이런 조건화에 특히 빠지기 쉽다.

이것을 숙고해 보라. 진정한 행복은 자신에게 진실한 것에서 나오고, 자신의 온전함을 기르는 것과 그 온전함으로 훌륭하게 사는 것에서 나온다. 진정한 관계는 다른 사람들과 진정한 온전함을 공유하는 것에 기반을 두고, 삶에서 깊은 본성과 목적을 표현하는 관계인, 진실한 관계를 구축하는 것에 기반을 둔다.

하지만 회유된 사람들의 관계를 보라. 그들은 “글쎄, 우리는 그 관계가 좋게 느껴지거나 괜찮은 한 함께 있으며, 우리가 함께 있지 않더라도 괜찮고 우리가 무엇을 하든 괜찮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관계는 괜찮지 않으며, 그들은 괜찮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그들이 자연스럽게 아는 능력은 그들의 의식에서 제거되었다. 그 결과 그들은 “나는 그런 것들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것들은 내 행복, 내 평화, 내 평온을 방해한다.”라고 말한다. 그런데도 평화나 평온은 여전히 없다. 왜냐하면 온전함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온전함이 없으므로, 진정한 관계도 없다.

당신은 여기서 사람들이 먹고 싶어 하는 바로 그 음식에 어떻게 독이 들어가는지 보이는가? 영적 양식에 독이 들어 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영적 교사가 진정한 분별력을 가르치는가? 얼마나 많은 교사가 개인의 온전함을 진정으로 장려하는가? 얼마나 많은 교사가 사람들이 명확하게 보고 알 수 있도록 격려하는가? 얼마나 많은 교사가 세상에 응답하도록 학생들을 격려하는가? 실제로 그런 교사들이 일부 있기는 하지만, 주위를 둘러보면, 알게 모르게 회유책을 장려하는 것을 당신은 볼 것이다.

이것은 외계인 의도에 정말 완벽하게 들어맞는다. 시간이 걸리지만, 그들의 관점에서 보면, 결과는 그만한 가치가 있다. 그래서 개입자들은 순응하는 사람들을 통해 그들 의도가 전해질 수 있는 방대한 조직망을 갖게 될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의도가 어디서 오는지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또 다른 시나리오에서는 상황이 더 복잡해진다. 여기서 개입자들은 개입의 어두운 면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모든 사람이 쉽게 회유될 수는 없다. 개입에 회유될 수 없는 이들은 개입을 반대하는 이들을 심판하는 쪽으로 개입자들이 유도할 것이다.

특히 이것은 극단적인 종교적 견해와 편견을 가진 사람들에게 해당할 것이다. 이 사람들은 자신들의 견해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들을 비난하는 쪽으로 유도될 것이다. 실제로 어떤 종교 단체에서는, 자기들이 구원받을 수 없다면, 그리스도의 적들을 모두 없애야 하고, 재림에는 인간 가족의 정화가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받는 사람들이 있다.

오늘날 이렇게 유도되고 있는 사람들이 있으며, 그들이 반드시 이 종교 단체의 지도부를 대표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좌절감이 커질수록 더 여기에 힘을 쏟을 것이다. 그들은 예수 재림을 기다리며, 재림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인간 가족에게 죄가 많기 때문이고, 이 죄는 이제 단순히 저항만으로는 안 되고, 근절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재림하는 예수는 진짜 예수가 아니라, 개입자들이 준비한 예수일 것이다. 이것은 실제로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는 거짓 예수일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앎으로 성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예수는 평화가 아니라 심판을 가져올 것이다. 추종자들은 이 심판을 환영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스스로 불만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고, 인류의 죄로 인해 그들의 예언이 실현되지 않는다고 믿으며, 지구에 천국을 가져오려면 이제 이 죄는 제거되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곳에 있는 큰 공동체 세력인, 개입자들은 정신 환경에 영향을 미치는 데 매우 능숙하고, 인간의 성향과 약점을 아주 잘 알고 있어서 이런 영향력을 제공하는 것이 얼마나 쉬운지 당신이 지금 당장 알 수 있겠는가? 이 조종으로 인해, 정의로운 사람들이 자신에게 동의하지 않는 이들이나 세상에서 앎을 보존하려는 이들과 어떻게 전쟁을 벌이기 시작할 수 있는지 당신이 알 수 있겠는가? 이런 일이 얼마나 쉽게 일어나는지 당신이 알 수 있겠는가?

심지어 그리스도를 진실로 믿는 이들조차 표적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러한 불만에 동조하지 않으므로 개입자들에게 유도되는 이들을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믿는 사람들은 조화와 인정과 관용을 강조할 것이다. 하지만 개입자들에게 유도되는 이들은 실패한 예언에 대한 복수만을 원할 뿐이다. 그들은 신의 벌이 가차없이 집행되기를 원하며, 자신들이 기꺼이 집행자가 되려고 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지금 신의 뜻이라고 믿는 것을 실행하기 위해 기꺼이 판사나 배심원이 되려고 한다. 개입자들이 반대하는 이들을 어떻게 제거할 것인가? 개입자들이 힘을 충분히 얻으면, 당신은 이것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지 알 수 있다.

회유가 이루어질 수 없는 곳에서는, 개입자들이 사람들에게 서로 적대 행위를 하도록 영향을 미칠 것이다. 세상이 더 어려워지고 자원이 감소할수록, 또 인구가 증가하고 경쟁이 심해지고 비극이 더 자주 일어날수록, 사람들의 관용은 줄어들고, 불만은 조장될 것이다. 이 불만은 개입자들뿐만 아니라, 야망을 품고 권력이 있는 자리에 오르고 싶은 사람들도 당연히 조장할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충성심을 단순화하고 재구성하려는 외계인 의도에 정말 완벽하게 들어맞는다. 개입자들은 이러한 결과를 달성할 수 있는 한 그들이 어떤 종교를 이용하는지는 신경 쓰지 않는다. 그래서 독실한 기독교인이나 이슬람교도, 힌두교도, 불교도 모두 앎길을 배워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그들이 영적 영향력과 큰 공동체 영향력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겠는가? 분별력이 없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더 높은 곳, 하늘에서 온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 당신은 누구를 믿을 수 있겠는가?

개입자들은 그들의 전달자가 되기 가장 쉬운 사람들을 행동하게 하려고 놀라운 영적 시나리오를 만들어 낼 수 있다. 개입자들에게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들은 단순히 드라마를 무대에 올리고 그 한 가운데 어떤 사람을 데려다 놓으면, 이 사람은 그 차이를 구분할 수 없다.

사람들은 큰 공동체에서 온 존재들이 무엇인지 모른다. 사람들에게는 그 존재들이 모두 그들의 수준이 아닌, 더 높은 곳인 다른 어떤 곳에서 온다. 그래서 어떤 시나리오에서는 어떤 열성적인 사람에게 예수의 모습이 투영되고, 그 열성적인 사람은 “예수가 나에게 왔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예수는, “너희는 내 진정한 추종자들을 모아야 하고, 다른 추종자들은 모두 규탄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그러면 그 열성적인 추종자는 “네, 마스터, 네, 마스터!”라고 말한다.

놀라운 일이기는 하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외계인의 의도가 인간을 획일화하고 순종하게 해서 충성하도록 하려는 것이라면, 불순분자, 순응하지 않는 분자를 제거해야 한다. 그들은 이 일을 직접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하면 개입이 있다는 것을 모든 사람이 알 것이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사람들의 종교적 신념과 폐해라는 명목으로 개입자들을 위해 그 일을 인간이 하게 할 것이다. 그리고 아무도 그 배후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 배후가 사탄이나 루시퍼라고 생각하겠지만, 그들은 알지 못할 것이다.

인류의 가장 큰 약점은 바로 인류의 무지이다. 인류의 가장 큰 힘은 바로 인류의 앎이다. 생명체가 거주하는 이 지역 우주, 큰 공동체는 상호작용과 영향력이 있는 매우 복잡한 환경이다.

만약 인간들이 자신들의 편견과 증오와 불만을 따르고자 하고, 영적 영향력과 큰 공동체 영향력 사이의 차이점을 구분하지 못하면, 큰 공동체는 극도로 위험한 환경이다. 큰 공동체에 있는 어떤 이가 결국 당신을 그들의 집단이나 조직으로 끌어들일 것이다. 그들은 이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들은 당신에게 새로운 어떤 것을 가르치기보다는 당신이 이미 믿는 것을 단순히 이용할 것이다.

그래서 앎길을 배우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것을 통해 당신은 큰 공동체 영성과 삶의 현실을 배우고, 조종의 본질을 배우며, 당신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보호하는 법을 배우기 때문이다. 그리고 회유책의 영향과 징후를 알아보는 법을 배우고, 다른 사람들에게 매우 영향력 있는 이 세력들의 영향을 받지 않기 위해 지금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을 배우기 때문이다.

이것은 지금 세상에 절대로 필요하다. 매일, 선한 양심을 지닌 사람들이 스스로 분별할 수 없는 설득에 넘어간다. 이것은 점진적인 과정이다. 하지만 결국에는 자기 삶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전혀 알지 못한 채, 바로잡으려는 어떤 것에도 적대적이 된다.

당신 스스로 큰 공동체 인식을 키우고 동행자의 메시지를 다른 이들과 공유하기 시작하면, 당신은 이 저항을 볼 것이다. 당신은 사람들이 응답하지 못하는 것을 볼 것이다. 그것은 마치 누군가가 그들 내면에 있는 플러그를 뽑아버려 이제 그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과 같다.

만약 어떤 수준에서 응답하면, 그들은 자신을 진정시키려고 할지도 모른다. 그들은, “그건 단지 하나의 관점일 뿐이고, 우리는 이 상황에서 좋은 점을 찾아야 한다. 우리는 정말로 이 상황을 받아들여야 한다. 만약 방문자들이 이곳에 왔다면, 그들은 틀림없이 어떤 목적을 위해 여기 왔을 것이고, 우리는 이 목적에 마음을 열어야 한다. 그들 중 일부는 좋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일부는 좋을 것이니, 그들을 이해하려면 그들을 사랑해야 한다.”라고 말할 것이다.

이것은 모두 회유된 정신 상태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냥 받아들이면 된다. 행복이 삶의 목표라면, 당신은 받아들일 것이다. 당신은 자신의 온전함을 양보할 것이고, 자신의 불안을 부정할 것이다. 당신은 여기에 어떤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징후와 신호와 단서들을 간과할 것이다. 당신은, “이것은 모두 삶이라는 드라마의 일부일 뿐이고, 나는 이 모든 것을 초월할 것이다.”라고 자신에게 말할지도 모른다.

오늘날 전 세계에서, 현자들은 개입자들이 지구에 있으므로 은거 생활을 하고 있다. 소수만이 개입을 알리는 위치에 있다. 마샬도 그런 사람 중 한 명이다. 그렇지만 그는 그를 도와줄 다른 이들이 필요할 것이다. 세상은 길을 잃지 않았지만, 길을 잃을 위험이 커지고 있다.

그러므로 당신은 모든 것을 무시하고 단순히 뒤로 물러나 시골에 가서 전원생활을 하고, 사계절 내내 매일 행복하고, 자연으로 돌아가 물통을 들고 옥수수를 심고 요리를 하면서 살아서는 안 된다. 그런 시절은 끝났다. 만약 자각하고 스스로 결정하고 온전함을 지니고자 한다면, 당신은 이제 도망쳐서는 안 된다. 숲으로 가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척해서는 안 된다.

자신을 지속적으로 치료해 주는 것은 없다. 결국 유일하고 진정한 치료는 자신이 아는 것에 현실적이 되고, 자신이 아는 것을 지지하며, 자신이 아는 것을 담고 있다가 그 아는 것을 연민을 가지고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데 필요한 지혜를 배우는 것이다. 이것이 모든 형태의 진정한 치료에서 행해야 하는 것이다.

당신은 과거로 돌아가 어린 시절을 교정할 것인가? 당신의 부모가 당신에게 주지 않은 사랑을 찾을 것인가? 이런 것들에 너무 집중하는 사람들은 장애인이 된다. 그들은 자신의 마음속에서 휠체어 신세를 지는 이가 된다. 그들은 모두 진실의 옹호자가 될 수 있지만, 그러기보다는 치료의 옹호자가 될 뿐이며, 오늘날 행해지는 많은 치료가 진실로 이어지지 않는다.

도망갈 곳이 없다. 자신의 온전함을 확립하고 진실을 알고 진실을 지지하는 것을 희생하면서 개인적으로 자아를 실현하는 길은 없다.

인류는 통합되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큰 공동체에 지배당할 것이다. 이것은 당신이 인류를 생각해 보면, 매우 분명하다. 만약 지구 밖의 다른 세력들이 지구 행성과 자원, 인간의 충성을 원하는데, 인간 가족이 분열되어 있으면, 인류는 정말로 다른 세력들이 사방에서 들어오도록 불러들이는 것이다. “그래, 어서 와! 모두에게 충분한 공간이 있어!”

개입에 저항하는 사람들은 개화되지 못했고 겁이 많다고 비난을 받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자신의 특별한 이해관계를 지키려고 개입에 저항한다는 비난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해관계를 위해 개입에 저항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개입이기 때문에 개입에 저항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회유책이 있으면, 누가 이 회유책을 그대로 회유책이라고 할 수나 있겠는가? 누가 저항과 비난을 초래하지 않고 “이것이 바로 회유책이야!”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오늘날 진짜 문제이다.

우리는 사람들이 분별력과 신중함을 기르고 비판력을 적용할 것을 장려한다. 여기서 우리가 장려하는 것은 개인적 편견이나 사회적 조건화에 기반을 두는 것이 아니라, 앎에 기반을 두는 것이다. 앎은 당신의 일부로서 아는 부분이다. 앎은 당신이 삶의 도전과 기회에 잘 대응하도록 창조주가 당신에게 준 당신 내면에 있는 큰 마음이다. 앎은 당신 내면에 있는 양심의 소리이다. 사람들은 그들의 믿음 체계를 비교하고 서로를 판단하지만, 이것은 우리가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인류를 노예로 만드는 상황에서 인류를 구하는 것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지구에 개입하는 큰 공동체 세력들에게서 인류의 자유와 자결권을 지키고 인류의 온전함을 장려하는 것에 대해 말한다.

이것을 이루는 것이 불가능한가? 어떻게 보면, 진실은 항상 불가능해 보인다. 진실을 장려하고 지키는 일은 항상 극복할 수 없는 역경에 직면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충분히 많은 사람이 진실을 절실하게 느끼지도 인식하지도 않고 소중히 여기지도 않기 때문이다. 이 곤경에서 인류를 벗어나게 하는 것은 모든 곤경에서 인류를 벗어나게 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진실을 마주하고,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다.

잘못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기 때문에 지금 세상에는 매우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이 많다. 어쩌면 그들은 자신의 불편함이 단지 심리적 문제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들은 그 불편함이 정치적·경제적·환경적 문제라고만 생각할지도 모른다.

만약 그들에게 큰 공동체 인식이 없다면, 그들은 틀림없이 자신의 관심을 다른 것에 맞추고 다른 것에서 원인을 찾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지금 일어나는 일에 관해 어떤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안다. 상황이 정상적이지 않음을 느낀다. 상황이 흘러가서는 안 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상황을 변하게 하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지만, 좋은 방식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것을 느끼는 사람들은 마음이 불편하다. 그들은 이 불편함과 함께 잠에서 깨고 이 불편함과 함께 잠자리에 든다. 불편함이 그냥 거기에 있다. 그들은 세상에 나가 있을 때도 불편함을 느낀다. 무언가가 정상적이지 않다.

이 불편함은 어디에서 오는가? 왜 불편함이 있는가? 당신은 명상을 할 수도 있고, 휴가를 갈 수도 있다.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도 있고, 기쁨의 순간을 누릴 수도 있다. 하지만 다시 불편함으로 되돌아간다. 무언가가 잘못되었다. 그것은 단순히 세상에 가난이나 전쟁, 박탈이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것들은 항상 당신과 함께 있었다. 무언가 다른 일이 여기서 일어나고 있으며, 그 일은 정말 정상적이지 않다.

그렇지만 당신이 주위를 둘러보면 사람들은 대부분 의식하지 못한다. 그들은 그것을 알지도 느끼지도 못하며, 신경 쓰지도 않는다. 또는 그럴듯한 핑계를 댄다. “그것은 단지 인간의 본성일 뿐이야.” 아니면 “그것은 사람들의 두려움이야. 그들에게는 사랑이 좀 더 필요할 뿐이야.”라고 말한다. 그리고 당신은 엄청난 어떤 일에 대해 정말 구차한 변명을 듣는다.

당신의 의식은 더 성장해야 한다. 진실의 불, 앎의 불인 당신의 불이 더 커지고, 더 강해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의 불은 항상 꺼진다. 개인적 양가성이나 개인적 두려움, 개인적 선호로 꺼지고, 회유책의 산물인 무기력함으로 꺼진다.

지금 여기에 큰 어둠의 세력이 있으므로 진실의 빛이 더 강해져야 한다. 속임수는 헤아리기 어렵고 복잡하다. 부정이 만연하고, 묵종이 만연하며, 날마다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오직 당신 내면에 있는 앎만이 그것을 꿰뚫어 볼 수 있다.

인류는 자유를 서서히 잃어 가지만, 확실하게 잃고 있으며, 뒤에 숨겨진 교묘한 의도로 인해 매우 완벽한 방식으로 잃어 가고 있다.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까닭은 오늘날 매우 많은 사람의 성향 때문이고, 또 현재 세계의 많은 지역에 잘 구축된 회유책의 효과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미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들, 또 이미 문제를 느끼지만 그 문제나 그 문제의 원인을 파악할 수 없는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려면, 용기와 공개적인 강한 지지가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묵종하기 시작했지만 그들의 내면과 주변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 만큼 온전함이 손상되지 않은 사람들, 또 안개가 낄 때 명료한 마음을 유지하려고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에게 다가가려면, 공개적인 강한 지지가 필요할 것이다.

완전히 묵종한 사람들에게는 답이 없을 수도 있다. 그들은 당신이 어찌할 수 없는 곳에 있을지도 모른다. 그들에게 다가가려면, 천사의 현존인, 큰 힘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심지어 이 힘도, 그들에게 다가가기가 꽤 어렵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은 자신을 구하려는 바로 그 은총의 손길을 자신이 피해야 하는 바로 그것이라고 생각할 만큼, 매우 완벽하게 회유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신이 다가갈 수 있는 사람은 단지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 자신의 온전함이 침해받고 있음을 아는 사람, 개입의 설득을 느끼기 시작했지만 설득에 묵종하지 않은 사람들뿐이다. 이쪽 진영에 있는 사람이 많다. 당신은 소수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공개적 지지는 시간이 걸릴 것이다. 이것은 몇 주나 몇 달, 몇 년 안에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것은 지속되어야 하는 일이다.

인류의 큰 공동체 출현은 개입으로 인해 상당히 어려울 것이다. 이 출현을 위해서는 충분히 많은 사람이 상위 의식을 기르고 보호하고 유지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높은 수준의 분별력과 신중함이 필요하고, 당신이 누구와 어울리고 무엇을 전하는지에 대해 많은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이것은 세상에 대한 큰 인식과 감수성, 또 지금 인류에게 영향을 끼치면서 세상에 있는 다른 세력에 대한 큰 인식과 감수성이 필요할 것이다.

이러한 인식과 감수성을 기르는 것, 또 한 개인의 온전함과 이 온전함을 나타내는 관계를 구축하는 것은 성공에 근본적으로 중요하다. 이것이 바로 앎을 세상에 계속 살아 있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유를 구축하여 세상에 계속 살아 있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류를 온전하게 지키는 것이다. 인류가 자신의 온전함과 자유를 한 번 잃고 나면, 되찾기가 매우 어렵다. 정말 어렵다.

심지어 사람들이 관계나 돈, 이익 때문에 자신의 온전함을 희생한 경우에도, 심지어 이런 더 평범한 상황에서도, 되찾기가 매우 어렵다. 당신은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야 하고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그러므로 문제에서 빠져나오는 것보다는 문제를 피하는 것이 더 쉽다.

당신은 자신의 세계에 갇힌 포로가 되어서는 안 되며, 자신의 마음에 갇힌 포로가 되어서도 안 된다. 당신은 누구에게도 다른 무엇에도 포로가 되어서는 안 된다.

만약 이러한 문제에서 큰 공동체 관점을 지닐 수 있다면, 당신은 인류에게 큰 어려움과 심각한 약점이 있지만, 여전히 인류가 우주에서 비교적 자유롭다는 것을 인식할 것이다. 물론 지구 표면에서 고립되어 사는 인류에게는 그 관점이 없으므로 이것을 볼 수 없다.

그래서 동행자 보고서가 매우 소중하다. 왜냐하면 그 보고서 없이는 당신이 스스로 알 수 없는 관점을 그 보고서는 제공하기 때문이다. 당신이 자신을 우주 다른 생명체와 어떻게 비교할 수 있겠는가? 큰 공동체에서는 이러한 자유가 드물고 잘 보호되어야 한다는 것을 당신이 알 수 없다면, 당신이 지닌 자유의 가치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동행자가 더 큰 관점을 제공한다. 그렇지만 어떤 사람들은 “글쎄, 그들은 우리에게 답을 주지 않는다. 그들은 우리에게 날짜와 사실, 수치와 장소를 알려주지 않는다.”라고 불평할 것이다.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바로 이해와 관점, 상위 의식이다.

동행자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아서 무엇에 쓰겠는가? 그들 행성의 이름은 당신에게 의미가 없을 것이다. 당신은 아주 오랫동안 그곳에 갈 수 없을 것이다. 당연히 당신 생전에는 가지 못할 것이다.

동행자는 큰 공동체와 개입에 대해 당신이 알아야 할 중요한 것을 제공한다. 그들은 당신에게 누가 여기에 있는지, 그들이 왜 여기에 왔고 무엇을 하는지를 알려준다. 그리고 이 개입에 대응하기 위해 해야 할 것을 알려준다. 여기에는 큰 공동체 인식과 상위 의식을 기르는 것이 포함된다.

이것들을 기르는 것은 항상 강조되어야 하며, 아주 지극히 중요하다. 이것들을 기르지 않으면, 사람들은 전체 요점을 놓칠 것이다. 아마도 사실이 아닌 그저 기이한 어떤 것이라고 가정할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 동행자들은 심지어 우리에게 그들의 이름도 그들이 이곳에 어떻게 왔는지도 알려주지 않는다.”라고 말할 것이다. 참으로 어리석은 소리이다.

신이 특사를 보내면, 당신은 그 특사가 사소한 질문에 답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 특사를 부정하는가? 신은 동행자들을 이곳에 보내, 이 시기에 인류가 마주한 심각한 위험을 인류에게 경고하고 인류를 교육하는 데 돕도록 하였다. 어떤 사소한 정보를 주지 않는다고 이것을 거부할 것인가?

그래서 큰 공동체 인식을 기르는 것이 지금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상위 의식을 장려하고 보존해야 한다. 그래서 당신은 앎을 세상에 계속 살아 있게 한다. 바로 이것이 이 큰 전환점에서 지지하고 존중해야 하는 것이다.

이 보고서를 존중하라. 이것을 은총의 선물로 인식하라. 이것에 응답하라. 이렇게 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라. 회유에 저항하라. 자신의 앎에 응답하지 못하게 되고 무기력하게 만드는 영향력에 저항하라. 다른 무엇보다도 자신만의 행복에 헌신하게 하는 유혹에 저항하라. 다른 종교나 문화, 국가에 속하는 사람들을 공격하게 하는 유혹에 저항하라. 인식과 이해를 통해, 또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것을 통해 개입에 저항하라. 인류의 협력과 통합을 증진하고, 인류의 온전함을 장려하라.